“청바지”, “미니스커트”, “비키니”

“옷이 날개다.”, “옷이 인생을 바꾼다.”, “남자는 여자의 검은색 옷에 약하다.”, “치마를 입는 여자는 바지를 입는 여자를 질투한다.”, “미인의 옷을 입는 것만으로 플러스가 된다.”, “여자는 인정받기 위해 브랜드와 트렌드를 좇는다.”라는 말들은 옷에 대한 다양한 의미와 가치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인 옷의 개념을 완전히 파괴한 옷들이 있다.

청바지”, 작업복이 스타의 의상으로 승격되다.

전 세계적으로 한때 청바지를 입었다는 것만으로 “반항아”로 보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스타들의 옷으로 탈바꿈하였다. 세상에 온통 넘쳐나는 그 많은 옷들 가운데서 청바지만큼 놀랍게 신분상승한 패션도 드물 것이다. 광부의 작업복에서 시작된 옷이 세계에서 내 노라 하는 스타들이 각종 무대와 시상식에서 입는 의상으로까지 승격했으니까 말이다.

청바지를 처음 고안해낸 사람은 1847년 독일 남부 바바리아 출신인 리바이 스트라우스란 젊은이였다. 청바지의 역사는 리바이가 인생의 성공을 꿈꾸며 뉴욕에 도착하여 서부 개척의 출발지였던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면서 시작됐다. 그는 처음 광부들이 질긴 옷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군용 천막용인 두터운 천을 염색한 후 굵은 실로 2중 3중 박음질하여 가슴까지 올려 멜빵으로 입는 “오버롤”(Overall)이라는 작업복을 만들었다. 특히 뒤주머니가 떨어지지 않도록 구리 못 같은 “리벳”(rivet)도 박아 넣었다. 이것이 훗날 전 세계인들이 즐겨 입는 청바지 “리바이스”(Levi󰡑s)로 탄생 될 줄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당시 옷 한 벌 가격이 1달러에 불과했지만, 나중에는 그가 만든 청바지는 광부들이 광산에서 채굴한 금보다도 더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더욱이 청바지는 세계 수많은 젊은이들이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은 유명 배우들과 가수들이 영화와 콘서트에서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고 나온 모습을 보고 열광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엘비스(Elvis)의 이름이 리바이스(Levi󰡑s)의 글자와 순서가 바뀐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청바지 혁명”이 일어난 것은 1970년대, 팝아트의 선두주자였던 앤디 워홀이 청바지를 소재로 작품을 내놓으면서부터 노동자와 스타들의 세계를 뛰어넘어 예술의 영역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1970년대 말 미국에서 청바지 판매량은 역대 최고조에 이르렀다. 미국 전역에서 시간당 6만 벌씩 팔려나갔고, 1980년대에는 세계와 유럽시장에도 청바지 붐이 일어났으며, 유럽 암시장에선 한 벌이 300달러에 거래될 정도였다. 거기에다 몇 해전 애플의 창업자이며, 세계 최고 경영으로 애플을 이끌었던 스티브 잡스까지 한몫을 했다. 소위 “잡스의 공식”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의 복장이다. 세인트 크록스 검은색 터틀넥 셔츠, 리바이스 501 청바지, 뉴밸런스 992 신발이 그것이다. 그가 입은 청바지는 새것도 헌것도 아니면서 적당히 물 빠진, 버튼식으로 히프 위 허리 아래에 걸려 있도록 했다. 영국 가디언지는 그가 생존시 마지막 아이패드 발표현장 때 그가 입은 청바지에 대해 “그의 복장은 철저히 계산된 중간층을 표방한 것이며, 남들의 시선을 의식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미니 스커트”, 여자에게는 패션이나 남자에게는

미니스커트는 고대 로마시대 때부터 군인이나 검투사, 그리고 노예들이 입었다. 중세 유럽에는 갑옷을 입은 아래 부분을 가리기 위해 짧은 치마를 입었다. 미니스커트는 1925년 프랑스 디자이너 폴 포와레가 처음 내놓았다. 당시에 무릎 위 부위를 드러내는 것은 일대 충격이었다.

그러나 실제 미니스커트가 대중들에게 소개된 것은 1965년 영국의 의상디자이너 메리 퀸트에 의해서였다. 미니스커트 열풍은 60년대부터 급속도로 불기 시작하여 패션계에 “대혁명”을 불러 일으켰다. 미니스커트의 열풍은 5대양 6대주를 휩쓸어 전세계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휘몰아쳤다. 미니스커트는 새로운 모델이라는 개념보다 여성 해방의 상징으로 이해되면서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신사의 나라 영국정부마저 처음 미니스커트를 해괴한 옷이라고 못마땅해하였지만, 미니스커트가 전 세계로 판매되는 열풍 앞에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극기야 영국정부는 퀸트 여사에게 망설임 없이 훈장까지 수여하기에 이르렀다. 거기에다 퀸트 여사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패션 아이콘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장 클로드 볼로뉴는 “중세사회가 하반신에 어느 정도 편견을 갖고 있었지만, 16세기엔 때론 무례하게 걷어올리는 것을 너그럽게 눈감아줬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미니스커트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한 순간에 주목을 받는가 하면, 여자들의 치마가 짧아질수록 경기가 좋지 않다는 속설까지 나도는 것을 보면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여자들에게 미니스커트는 하나의 유행이며, 패션일 뿐일 수 있겠지만, 그러나 남자들에게 있어 미니스커트는 아직 익숙지 않는 패션임에 틀림없다. 다른 사람에게는 차마 “그 치마가 너무 짧아!”라고 말하지 못해도 자기 아내나 딸이 미니스커트를 입었다면 분명 “너무 심한 것 아니냐?” 한마디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아가 아직까지 지구상에 여러 나라들이 미니스커트를 금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평범한 옷이 아닌 것만 틀림없어 보인다. 지금도 베일을 쓰고 다니는 무슬림의 여인들에게 미니스커트는 그야 말로 그림의 떡일 뿐이다.

비키니”, 핵폭탄같이 떨어진 패션

지금껏 지구상에서 선보인 패션 가운데 비키니보다 충격적인 것이 없을 것이다. 비키니는 한마디로 온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패션이었다. 1946년 프랑스의 디자이너 루이 레아는 여자의 신체 가운데 가장 예민한 가슴과 배꼽과 등을 포함하여 몸 전체의 90% 정도를 가감하게 노출시킨 비키니를 내 놓았다. 바티칸은 즉각 “부도덕한 의상”이라 비난했고, 스페인, 이탈리아에선 아예 착용을 금지 시켰고, 소련은 “퇴폐적 자본주의의 샘플”이라고 매도했다. 그럼에도 비키니는 전염병처럼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루이 레아가 수영복을 비키니라고 한 것은 1946년 미국이 핵폭탄실험을 했던 남태평양 산호섬, 비키니란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미국이 남태평양 비키니 섬에서 핵폭탄을 실험한 것이 사회적으로 거대한 충격과 이슈를 가져 왔던 것처럼 “비키니” 또한 실제적으로 패션계에 핵 폭탄과 같은 거대한 충격을 주었다

비키니 섬은 지구 반대편 남태평양에 있는 작고 아름다운 산호섬의 이름이다. 미국은 비키니 섬에서 1946년부터 1958년까지 총 67종의 핵실험을 했다. 그로 인해 비키니 원주민들은 섬에서 쫓겨났고, 다시 20여 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지만, 위암과 폐암, 각종 희귀한 질병이 속출함으로 어쩔 수 없이 다시금 섬을 떠나야 했다.

비키니 섬의 이런 슬픔과 고통을 알았는지 몰라도 미국의 어린 소년 브라이언 하일 랜드는 1960년 8월 “아주 작고 노란 물방울무늬 비키니”라는 노래를 부르므로, 반핵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꼭 끼는 노란색 노란 물방울무늬 비키니였지요. 처음 입어보는 비키니랍니다. 그녀는 탈의실에서 나오기가 겁이 났지요. 그래서 해변가에 앉아있었지요. 그녀는 계속 수건을 두르고 싶었지요. 이제는 물 속에서 나오기가 겁이 났어요. 가엾은 작은 소녀는 새파랗게 질렸어요.” 이 노래는 비키니를 처음 입어 본 소녀의 두려움과 핵으로 슬픈 운명에 처한 비키니섬의 불안한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널리 불려졌고, 빌보드 차드 1위에까지 오르기도 했다. 핵과 비키니가 전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지만, 그 충격의 의미는 서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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