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 요한복음 1: 35-51
제목 : 동네 사람들이 변화되다. 2016. 6. 5
우리는 매일 가족들을 만납니다. 집밖으로 나오면 먼저 “portero”를 만나 “Buenos Dias”라고 인사를 합니다. 말은 많이 하지 않지만 주변 스페인 사람들을 마주하게 되며, 직장에서 직장동료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1주일에 한번 이상 교회에서 “사랑의 교회 성도들”을 만납니다. 이렇게 만나는 사람들을 “동네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동네 사람들 가운데, 반가운 사람도 있지만, 피하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보통 1주일에 한번 씩 만나는 사람이 있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담배를 피우는 스페인 부인입니다. 만날 때마다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하면 “여기는 실내가 아니다.”라고 대구를 합니다. 몇 차례 실랑이를 해도 소용이 없어 “피해야 하겠다.” 생각하지만 그래도 한번 씩 만나면 좀 불편합니다. 우리말에 “이웃사촌”이란 말이 있고, 영국 속담에도 “좋은 이웃이 멀리 있는 형제 보다 낫다.”는 말이 있는데, 이웃이란 “같은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에 비해 예수님은 누가복음 10장에서 “선한 사마리아 비유”에서 “참 이웃이란 도움이 필요한자에게 필요를 제공하는 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된 것은 혈연적이나 지연적인 관계 때문이 아닌 필요를 채워 주었기에 참된 이웃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동네 사람들이 변화되다.”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 동네 사람들이 참 이웃이 되다.
예수님 당시, 유대북쪽에 위치한 갈릴리는 소외된 지역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갈릴리를 “흑암에 앉은 백성”(마4:16)이라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갈릴리 지역에서 위대한 인물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나다나엘 또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요1:46)
그럼에도 주님은 이런 소외된 갈릴리 지역을 가장 먼저 찾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주님을 통해 복음을 받은 네 사람이 훗날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본문에는 네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안드레와 베드로, 빌립과 나다나엘입니다. 이들 모두는 나이도 서로 비슷했고, 갈릴리 출신이었습니다. 이 중 가장 예수님을 가정 먼저 만난 사람은 안드레입니다. 안드레는 곧바로 그의 형제 베드로를 주님에게 인도하여 두 번째로 주님을 만났습니다.
세 번째로 주님을 만난 사람은 빌립입니다. 빌립 또한 주님을 만난 후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하였습니다. 공관복음에는 바돌로매란 이름으로 기록되었지만, 요한복음에만 “나다나엘”이란 이름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동일 인물로 보입니다. 이리하여 한 동네에 살던, 네 젊은이들이 한꺼번에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이들은 주님을 만나기 전부터 같은 고향사람들이었습니다. (44절)“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그러나 이들은 같은 동네, 같은 고향 사람들로만 머물러 있지 않고, 주님을 통해 더 가까운 이웃이 되었습니다.
고향에서 같은 직업을 가지고 함께 일할 때 서로를 잘 이해 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고향 사람, 선후배 동기라는 것만으로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냥 이웃이 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웃이 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레25:17)“너희 각 사람은 자기 이웃을 속이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바울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믿음의 이웃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고후6:14)“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요즘에는 대인관계에서 세대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무척 어렵습니다. 부모세대는 자식세대가 왜 똑같은 푸른색의 청바지를 3벌씩이나 사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도대체 왜 운동화를 여러 켤레 사는지도 결코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식들 또한 부모가 이해 안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소유의 차이도 큽니다.(창13:2절)“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창13:7)“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조카 롯도 소유로 인해 서로 다투었습니다. 그렇지만 남녀노소, 세대차이보다 더 큰 차이는 바로 믿음의 차이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차이가 어떤 갈등을 가져왔는가를 끊임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서로 다른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 함께 일한다는 것보다 어렵고 힘든 것이 없습니다.
“그 사람이 좋다. 괜찮다.”는 말과 “그는 믿음의 사람이다.”는 말은 전혀 다릅니다. “그 사람이 좋다. 괜찮다.”는 것은 자기를 기준으로“좋다, 괜찮다.”라는 말이지만, “믿음의 사람이다.”란 말은 기준이 있습니다. 모든 분쟁과 다툼의 원인은 믿음의 차이에서 온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 동네 사람들이 믿음의 형제가 되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친 형제였지만 성격은 대조적이었습니다. “안드레”란 남자답다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그는 남자답지 못했고, 베드로는 다혈질적이었지만 좋은 형제였습니다. 그럼에도 안드레와 베드로는 육신의 형제관계를 넘어 영적인 형제, 믿음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구약에서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그들의 성격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컸었습니다. 에서는 도전과 모험심이 강했고, 야곱은 조용한 성격으로 집안에서 엄마 치마폭에서 자랐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형제였지만 야곱에게 속은 것 때문에 에서는 20년 동안 야곱을 죽이려 했습니다.
요셉 또한 다른 사람이 아닌 형제들에게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요셉을 노예로 팔았지만 요셉은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요셉은 형제들에게(창45:5) “당신들이 나를 판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그가 처한 상황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 시 했습니다.
우리는 탕자 비유를 잘 압니다. 둘째 아들이 어디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되었습니까? 둘째 아들의 불행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떠나 유산, 물질에 우선을 두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돈이 떨어졌다고 탕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에 탕자가 된 것입니다. 이 비유는 누구든지 하나님 아버지를 떠난 사람들은 영적인 탕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형제와 자매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우리의 관계는 영적인 형제, 자매,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형제, 자매, 친구가 되지 않을 때 수시로 찾아오는 갈등과 다툼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항상 빠트리지 않는 문구가 있습니다. “주안에서 사랑하라.”“주안에서 순종하라.”“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입니다. 주안에서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면 모든 것이 쉽게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딤전5:8)“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냥 형제, 자매, 가족으로, 그냥 친구로 머물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안에서 맺어진 형제, 자매, 가족, 친구가 되길 바랍니다. 안드레의 위대함은 그의 형제 베드로를 육신의 형제 관계에서 믿음의 형제 관계로 변화시킨 일입니다. 우리 또한 육신의 관계를 넘어 신실한 믿음의 형제, 자매 관계로 성숙되길 바랍니다.
- 동네 사람들이 주님의 제자가 되다.
어떤 동네 네 친구가 자신의 약점을 고백하기로 했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나는 거짓말을 고치지 못하는 습성이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친구는 나는 도둑질하는 습관이 있다고 고백하였고, 세 번째 친구는 나는 남의 돈을 갚지 않고 있다고 했습니다. 네 번째 친구는 나는 고백하지 못하겠다고 발뺌을 했습니다. 친구들이 왜 못하느냐? 다그치니 “내 비밀을 알면 나는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동네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갈릴리 출신으로 예수님의 12제자가 된 사람은 모두 7명입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나다나엘), 그리고 마태(가버나움)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갈릴리에서 “대박이 난 났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사9:1)“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자기 고향과 동네와 형제를 위해서 고기 몇 박스 정도는 기쁘게 선물하거나 손해를 감수 할 수 있겠지만, 자기의 직업이나, 배는 포기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안드레는 주님을 위해 배와 직업도 기꺼이 포기했습니다. 여기에서 버렸다는 것은 “두 번째로 두다”란 뜻입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이 그냥 동네 사람으로 동네 친구와 육신의 형제로 머물 수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믿음으로 맺어진 이웃 되어야 하며, 믿음의 형제자매가 되어야 합니다. 그보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할 각오된 사람이란 뜻입니다.
모세도 이 사실을 알았기에 (히11:26-7)“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왕권과 애굽의 모든 보화를 포기했습니다.
주님은 (요15: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의 관계 또한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육신의 관계를 넘어 믿음의 관계로 변화되어야 진정한 가족, 형제, 부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대부분 20-30대 청년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를 때 “소자야”“얘들아, 젊은이들아”고 불렀습니다. 제자들은 처음 “누가 서로 높으며, 큰 가?” 서로 다투며,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주님께서 기도하라고 했을 때에 잠만 잤습니다. 그리고 모두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3년이란 기간을 통해 귀한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운 일군이 되었습니다. 인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집니다.
유대인 신학자 부버는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고 함으로 인간관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부모를 만나고, 시간이 지나 친구와 배우자를 만납니다. 또한 지금 우리는 사랑의 교회를 통해 만났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만남과 관계가 현재와 같은 상태로 만족해야 하는가? 오늘 주님은 우리의 관계도 변화시켜야 한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1.우리는 그냥 동네 사람, 고향사람으로 머물지 않아야 합니다. 믿음의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2.우리는 그냥 형님, 동생, 언니 동생으로만, 머물지 않아야 합니다. 믿음의 형제,
자매로 변해야 합니다. “엄마는, 아빠는 형님, 언니는 정말 나의 믿음의 롤 모델이야!”
3.우리는 그냥 주님을 섬기는 자가 아니라, 주님의 제자로 섬겨야 합니다. 우리 가정과 사랑의 교회가 믿음의 관계로, 주님의 제자로 변화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