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와 비견되는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은 신의 손, 근대 조각예술의 선구자, 낭만주의 조각가 등 화려한 수식어와 함께 차가운 돌 속에 인간의 고뇌와 열정, 그리고 감성을 담아낸 천재 조각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 “생각하는 사람”, “지옥문”, 그리고 “칼레시민”은 빼놓을 수 없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힌다
“생각하는 사람”, 인생의 최후를 생각하라.
한 남자가 벼랑 끝에 웅크려 깊이 생각에 잠겨 있는 로댕의 걸작품 “생각하는 사람”(1880-1902)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근대 낭만주의 작가와 화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독일의 판화 조각가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의 판화 “멜랑콜리”를 연상케 한다. 뒤러의 판화 “멜랑콜리”는 내면에 갖고 있는 우울한 병리적인 감정까지 적나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흡사하다 하겠다.
나아가 “생각하는 사람”은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카르트”(1596-1650)의 철학적 대명제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양식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하지만 사람들은 “생각하는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로댕의 작품 “생각하는 사람”은 원래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나오는 작품의 일부분이다. “생각하는 사람”은 로댕이 지옥문 가장자리에서 구원받을 수 없는 영혼들을 내려다보며, 깊이 생각하고 있는 조각상이다.
무엇보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그림으로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있다면, 바로 미켈란젤로(1475-1564)의 “최후의 심판”(1537-41)이 아닌가 생각된다. 미켈란젤로는 약 5년간에 걸쳐 교황 파울로스 3세의 의뢰를 받아 교황 선출 장소로 유명한 시스티나 성당의 제단 정면을 가득 채운, 높이 17m, 폭 13.3m의 대형 벽화에 “최후의 심판”을 완성하였다. “최후의 심판”은 하늘을 가득 메운 수많은 사람과 천사들을 배경으로, 상단은 심판 주되신 그리스도의 위엄한 모습을, 그리고 맨 아래는 수많은 영혼들이 어떤 형벌보다 무서워 전율을 느끼며 울부짖고 있는 참혹한 모습을 그려 놓았다.
그런데 얼마 후 어디선가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미켈란젤로는 이단이다!” 미켈란젤로를 두둔하고 작품을 의뢰한 파울로스 3세 마저 “이처럼 저질스럽고 음란한 장소에서 어떻게 기도와 찬양이 나오느냐?”라고 막말을 내 뱉었다. “그림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 “부분만 수정하자.”라는 논쟁이 끊이지 않았지만, 용케도 “최후의 심판”은 오늘까지 잘 보존되어 최고의 걸작품으로 남아 있다. 미국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1842-1910)는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금세기 위대한 발견은 물리학이나 과학이 아니라 사람이 생각을 바꿀 때 그 사람 인생 전체가 바뀐다는 사실을 발견한 일”이라고 했다.
“지옥문”,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단테의 신곡, 지옥편(2곡 1절)에 나오는 구절이다. “안토니 비버”는 제 2차 세계대전 가운데 가장 치열했던 스탈린그라드 590일 전투에 관한 책을 내면서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부제로 “세계 역사를 바꾼 스탈린그라드 전투 590일의 기록”이란 책을 펴냈다. 또한 이 구절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포로수용소에 걸려 있던 문구이기도하다. 1880년 프랑스 정부는 로댕에게 당시 돈으로 8,000프랑을 제시하며, 장식미술관의 현관문” 제작을 의뢰했다. 로댕은 단테의 신곡 지옥편(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을 소제로 제작하였고, 이름 또한 단테의 지옥편을 바탕으로 “지옥문”(1880-1900)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지옥문”은 로댕이 만든 작품의 집합체이자 결정체라 할만하다.
로댕의 지옥문은 청동문의 높이 7.57m, 너비 4m나 되는 공간에 186명의 사람들이 지옥의 형벌을 받으며 비탄에 빠져, 고뇌 속에 몸부림치는 장면을 형상화 했다. 다른 작품들도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로댕의 “지옥문”은 조형이 너무 사실적인데다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격렬하고 억센 신체적인 표현들에 대해 전문가는 물론, 일반인들까지 거친 숨을 내 뿜을 정도로 거부감을 가졌다. 그럼에도 로댕이 “지옥문”을 제작하는 동안에 “칼레시민”을 제작해달라는 주문이 들어왔고, “칼레시민”을 마치기도 전에 “빅토르 위고의 기념비”를 제작해달라는 요청까지 받았다. 로댕은 지옥의 참혹한 광경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인물들을 좌상, 입상, 와상, 독상, 군상 등, 다양한 방식을 채택하였다.
로댕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생각하는 사람”, “키스”, “세 그림 자”, “탕자” “아담”, “이브” 등은 모두 “지옥문” 속에 나오는 작품(소품)들이다. 갈수록 “지옥문”의 작업이 방대하게 되자 로댕 자신도 “노아의 방주를 짓고 있는 것 같다.”라고 털어 놓았을 정도였다. 로댕은 열정을 가지고 죽기까지 37년 동안 “지옥문” 제작에 매달렸지만, 결국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1889년 귀스타프 게프루아는 “아담과 이브가 저지른 원죄 이후로도 똑같은 고통이 반복되는 운명이 곧 지옥문의 주제”라고 말했다. 로댕은 “지옥문”을 미완성으로 남겼지만, 작품의 주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칼레시민”, 노블레스 오블리즈의 기원이 되다.
14세기, 영국이 프랑스의 땅 3분의 1을 지배하고 있을 때에 두 나라는 백 년 넘게 싸웠다. 이를 백년전쟁(1337-1453년)이라고 한다. 이토록 지긋 지긋한 100년 전쟁을 종식시킨 사람이 바로 “잔 다르크”라는 사실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백년 전쟁 초기인 1345년,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칼레시민과 11개월 공방을 벌인 가운데 항복을 받아냈다. 전쟁에서 승리한 에드워드 3세는 갈래시민을 향해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칼레 시민들의 생명은 보장하겠다. 그러나 누군가 전쟁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한다. 칼레시민을 대표하는 6명은 스스로 교수형에 사용할 밧줄을 목에 걸고 맨발로 걸어 내 앞에 나와야 한다.” 시민들은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었다. 누군가 6명이 시민들을 대신하여 희생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때 용감하게 나선 6명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칼레시의 핵심인물이며, 아주 부유한 귀족들이었다. 가장 먼저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먼저 나서자, 뒤를 이어 “장 데르”, “자크 드 위쌍”, “장 드 피엥스”, “피에르 드 위쌍”, 그리고 “당드리에 당드르”가 스스로 밧줄을 목에 건 채 맨발로 영국 왕 앞에 나섰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왕이 처형을 내리려는 순간, 임신한 왕비의 간청으로 스스로 희생을 감수한 용감한 시민 6명은 극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고, 이후 6명은 칼레시민의 영웅이 되었다. 그로부터 550년이 지난, 1884년 칼레 시는 로댕에게 6명의 조각상을 의뢰했다. 로댕은 11년 동안 심혈을 기울려 1895년 “칼레의 시민”(1889, bronze, 217 x 255 x 177cm)이란 불멸의 작품을 완성하였다. 이후 조각상은 12개로 복제되어 12개국으로 보내졌고, 그 중에 한 작품이 한국에까지 보내져 한국인들도 국내에서 로댕의 걸작품 “칼레시민”을 볼 수 있게 됐다.
이들 칼레시민의 희생정신에서 오늘날 높은 지위를 가진 자의 의무를 상징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즈”(Noblesse Oblige)란 말이 비롯됐다. 원래 “노블레스”는 “닭의 벼슬”을 의미하고 “오블리즈”는 “달걀의 노른자”라는 말로, “닭은 벼슬은 자랑하기 위해서 있지 않고, 알을 낳는데 있다.” 란 의미이다. 즉, 높은 신분과 지위는 도덕적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란 뜻이다. 과거 유럽의 귀족과 부유층들은 특권을 누리기도 했지만 전쟁과 같은 국가적인 재난이 일어났을 때는 희생을 감수하고 스스로 전쟁에 참가하는 모범을 보였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1952년 여왕에 즉위하기 전, 2차 대전 중에 군복을 입고 간호병으로 자원 했고, 한국전쟁이 발발 했을 때는 미국의 장성들의 자녀 139명이 전쟁에 참전하여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그들 중에는 1952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 육군원수의 아들인 아이젠하워 소령과, 제 3대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던 마크 클라크 대장의 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