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 공주, 신데렐라, 인어 공주

“생쥐 한 마리로 세계를 제패한 사람”, “꿈을 파는 기업”, 월트 디즈니(Walt Disney, 1901-1966)와 월트 디즈니사(The Walt Disney Company, 1923)에게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표현은 없을 것이다. 미키 마우스를 공식 마스코트로 사용하고 있는 월트 디즈니는 지금 미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상징이고, 미국의 문화를 대표한다. 1937년 월트 디즈니는 “백설 공주”를 시작으로, 신데렐라(1950)”를 포함, 지금까지 9명의 공주를 탄생시켰다. 무엇보다 월트 디즈니는 유럽의 전통적인 고전 동화를 벤치마킹(benchmarking)하므로 위기를 극복하며, 작품을 성공시켰다.

월트 디즈니사의 맏언니, “백설 공주

우선 “백설 공주”는 월트 디즈니사에서 제작한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이자, 세계 애니메이션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 중의 명작 장편 만화영화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지금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태어났을 때나 어린 시절 때쯤 최초로 본 애니메이션이라고 보면 된다. 특이한 것은 월트 디즈니사에서 동화 백설공주를 원작으로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방영한 이후로 애니메이션 자체가 영화로 대접 받게 되었다. 비록 미국적 가치관의 주입이라는 비판적인 측면도 있지만, 백설공주를 비롯,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만들어낸 동화 속의 세상 이야기는 지구상에 있는 어린이들과 심지어 어른들에게까지 아름다운 꿈과 이상을 심어 준 것에 대해서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백설 공주(白雪公主)는 독일의 그림 형제가 쓴 작품으로 유럽 여러 곳에 퍼져 있는 전설을 바탕으로 한 동화이다. 또한 16세기 독일의 귀족이자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가 흠모하였다는 실존 인물 마르가레테 폰 발데크의 이야기 등이 뒤섞여져서 백설 공주로 재탄생 되었다. 그럼에도 동화 백설 공주는 월트디즈니사와 만남으로 원작자와 상관없이 최고의 작품으로 탄생되었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만화영화는 단편으로, 1시간이 넘는 장편 만화영화는 아무도 보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월트 디즈니가 80분이 넘는 만화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론 그의 아내마저 “누가 돈을 내고 난쟁이가 나오는 영화를 보겠어요?”라고 말할 정도로 매우 비관적이었다. 그러나 장편 만화 영화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에 대한 월트 디즈니의 도전은 역사가 길이 남는 성공사례가 되었고, 오늘날의 거대한 디즈니가 되는 초석이 되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월트 디즈니사는 “백설 공주”의 성공위에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신데렐라, 잠자는 숲 속의 공주(오로라), 백설공주를 포함하여 1세대에 속하는 디즈니의 공주들은 두고두고 욕을 먹었고, 결국 그들의 좋은 시절은 1950년대로 끝이 났다. 페미니즘과 흑인인권운동이 활발해진 1960년대에는 회사 자체가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무엇보다 비윤리적이고 잔인한 복수극에 대한 소재, 가학적이고 잔인한 사건, 누가 보아도 “미성년자 관람 완전 불가”로 분류되어야 할 내용들에 대한 질문들이 디즈니를 괴롭혔다.

월트 디즈니사의 약과 병이 된 신데렐라

대체적으로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월트 디즈니사에서 제작한 대부분의 애니메이션은 전 세계를 휩쓸었다. 그렇지만 1,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디즈니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제작은 오히려 침체기를 맞게 되었다. 그토록 호황을 누렸던 애니메이션이 1960년대에 불과 3편 정도만 제작했을 뿐이다. 많은 이유 중 하나는 장편 애니메이션이 극영화에 밀린 탓이 컸다. 디즈니사가 이런 불황을 타게 하기 위해 승부수를 던진 대표적인 작품이 “피터 팬”과 “신데렐라(Cinderella)”였다. 신데렐라는 동화의 주인공이자 동화 제목으로, 우리 말 노래 가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 샤바 샤바 아이샤바 얼마나 울었을까? 샤바 샤바 아이샤바…” 어릴 때 소위 세세세를 할 때나, 여자 아이들이 고무줄놀이를 할 때 빠지지 않고 부르던 노래 말이다. 신데렐라는 유럽과 지중해 문화권에서 오래전부터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로 정확한 원작자가 누군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디즈니사가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때 모델로 한 프랑스 “샤를 페로”이 자연 원작자가 되어 버린 셈이다. 백설공주의 약효가 떨어졌을 쯤에 디즈니사 내 놓은 새로운 카드가 바로 신데렐라였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디즈니사는 위기를 만날 때마다 작품의 소재를 유럽에 있는 것을 갖다 사용한 점이다.

디즈니사의 선택은 적중했다. 하지만 신데렐라는 관심과 인기와 함께 신데렐라 증후군을 만들어 냈다. 소위 “신데렐라 증후군”이란 “일반적으로 여성들이 자신의 힘과 능력 나아가 사회적인 배경으로 높은 위치에 설 수 없을 때에 자신의 인생을 180도 바꿔줄 사람을 찾거나 의존하고 싶어 하는 여성의 심리”를 말한다. 결국 월트 디즈니사가 만들어 낸 디즈니 공주들(특히 1세대 공주들)은 페미니스트들이란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공주들이 만들어낸 “수동적인 여인상, 구원자를 기다리는 여인, 집안일이나 하는 여성상”을 특히 젊은 여성들이 모방하게 되었고, 그 비판은 디즈니의 몫이 되었다.

월트 디즈니사가 28번째 선택한 인어 공주

1942년 TV가 도입된 후에도 월트 디즈니는 계속해서 장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했고, 1955년에는 초대형 공원 디즈니랜드를 개관했다. TV를 통해 방송된 개막식에서 디즈니는 이렇게 말했다. “디즈니랜드에서는 과거에 대한 추억으로 나이를 잊을 수 있고,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젊음을 되살릴 수 있다.” 그럼에도 오히려 암흑기는 앞당겨져 찾아왔다. 여기에 1967년 창업주 월트 디즈니가, 1971년에는 로이가 사망하면서 디즈니사의 앞날은 더욱 불투명해졌다. 이 무렵 디즈니가 선보인 작품 중에선 기억에 남을만한 애니메이션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제작비의 절반도 회수하지 못한 것도 바로 1980년대였다.

이런 지리멸렬할 것만 같았던 디즈니의 내리막 역사를 마감하고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준 작품이 바로 “인어공주”(The Little Mermaid)였다. 디즈니사는 덴마크의 동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1805-1875)이 쓴 130여 편의 동화 가운데 “인어공주(1989)”를 각색하여 28번째 클래식 애니메이션 영화를 제작했다. “인어공주”를 디즈니 고유의 동화 속 세상과 뮤지컬이 어우러진 전통적인 색깔을 그대로 살려내면서 대중을 사로잡았다. 무려 400명 이상의 예술가와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100만장 이상의 그림을 그려 제작했다. 디즈니사와 안데르센이 만남으로 다시금 1940년대 이루었던 디즈니 황금기가 돌아온 셈이다.

디즈니사는 “인어공주”를 방영되면서 수익은 물론 침체된 애니메이션 세계를 되살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타임지의 리챠드 콜리스는 “만일 만화가 영화 도중에 기립 박수를 받은 적이 있다면 바로 인어공주가 처음일 것이다.” 라고 평했다. 월트 디즈니와 관련된 코닥회사는 다음과 같은 통계를 발표한 바 있다. “미국에서 인화되는 사진의 5퍼센트는 디즈니랜드에서 찍은 것이다.” 디즈니사와 안데르센의 동화와의 만남은 비단 디즈니회사뿐 아니라 실제로 덴마크 정부도 큰 자극을 받아 2005년을 “안데르센의 해”로 정하고, 수백억의 예산과 각종 기념사업에 쏟아 부어 대대적인 기념사업을 벌였다.

이제 미키마우스는 디즈니의 아이콘을 넘어 미국의 상징이 되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디즈니랜드는 현재에도 세계 여러 곳에서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에게 꿈과 추억을 선물하고 있다.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고민했고, 모두가 두려워하는 것을 시도했고, 실패 앞에 절대 물러서지 않았고, 마음먹은 일은 끝까지 해 내고야 말았던 월트 디즈니는 지금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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