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6일 주일 설교 / 나에게 남은 시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성경 : 벧전 4 : 7 – 11

제목 : 나에게 남은 시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2015.12. 6

28살, 젊은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사형을 집행하던 날 사형수에게 마지막으로 5분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28년 동안 살아온 사형수에게 비록 짧았지만, 5분은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5분을 어떻게 쓸까? 그는 고민 끝에 자신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와 작별하는 기도를 하는데 2분, 지금까지 살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옆에 있는 사형수들에게 작별 인사를 나누는데 2분, 마지막 1분은 자연과 땅에 대해 감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눈물을 삼키며, 가족들과 친구들을 생각하며, 작별인사와 기도를 하는데 벌써 2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는 순간 “아-! 이제 3분 후면 내 인생이 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아-! 다시 한번 인생을 더 살 수만 있다면…정말 시간을 아껴 써야 하겠다.”고 눈물을 흘릴 때 기적적으로 사형집행 중지명령이 내려 목숨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등 불후의 명작을 발표한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입니다. 구사일생으로 살게 된 “도스토예프스키”는 평생 5분간의 시간을 생각하며, “시간의 소중함”을 생각하며 순간순간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 결과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의 최고 문호 톨스토이에 비견되는 세계적 문호로 성장하였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베드로 사도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라고 하였는데, “만물의 마지막”이란 개인과 우주적인 종말을 가리킵니다. 개인의 종말은 개인의 죽음을 뜻하며, 우주의 종말은 주님의 재림을 가리킵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3가지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1. 나의 남은 시간은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한다.

(7절)“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정신을 차리라.”는 군사용어로 보초를 서고 있는 군인에게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는 말입니다. 즉 “주변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근신하라”는 “술에서 깨라”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주변은 적으로 둘러 싸여 있는데, 병사가 술에 취해 있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기도는 혼미한 마음을 가다듬게 하고, 경성하게 하기에 기도하라고 한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기도가 없이는 우리의 삶이 혼미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남은 시간은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게으르고, 육체적인 탐닉과 정욕을 위해 그 많은 세월을 허비하지 말며, 육체 주도적인 삶을 멈추고 영적인 주도적인 삶으로 바꾸라는 말입니다.

금번 아프리카 튀니지를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바울이후 최대의 신학자이며, 믿음의 사람으로 알려진 어거스틴이 성장한 곳과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30년 동안 기도한 곳을 돌아보고 왔습니다.

그의 고백론 제 2권에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16세 여자를 꾀어 임신을 시켜 아들을 낳았고, 선을 행하라고 가르치는 것에 대한 반항 심리로 친구들과 어울려 도적질을 일삼았으며, 한동안 이단 중의 이단이라고 할 수 있는 마니교라는 혼합종교에 흠뻑 빠져들었다…”

이런 방탕한 아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어머니 모니카는 30년 동안 눈물로 기도한 결과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이 33살 때에 로마서 13:13-14 “낮에와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을 읽고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사람에게 여러 가지 욕망이 있습니다. 식욕, 소유욕, 육체적인 욕망 등이 있습니다. 이중 육체적 욕망은 결혼한 사람에게 별로 문제되지 않지만, 미혼인 경우는 충족되지 않습니다. 육체적 욕망은 그냥 없어지지 않는 것에 고민이 있습니다. 배고픔은 참거나 기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배고픈 욕구는 먹는 것 외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행한 것은 육체적인 욕망은 문화 행위를 통해서 대치되며 극복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프로이드는 “문화 행위 중 가장 강력한 것이 신앙행위이다.”라고 했습니다. 육채적인 욕망은 운동이나 취미생활, 여행 등 여가 활동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청소년들이 매주일 함께 축구를 하는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청소년의 시기에 가장 위험한 것은 자신을 혼미한 상태로 방치 해 두는 것입니다. 공부도 재미가 없고, 좋아하는 스포츠도 없고, 취미 생활도 없고, 믿음도 없을 때에 육체적인 욕망이 우리 자신을 포위하게 됩니다. 우리는 유혹에 바지지 않도록 경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 몸과 마음이 죄와 악의 제물이 되지 않도록 더욱 경성하며, 기도로 무장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2. 나의 남은 시간은 빚을 갚으며, 살아야 한다.

(8절)“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베드로는 사랑을 “죄를 덮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베드로는 스승을 모른다고 배반하였지만, 주님은 다시 사명을 맡겼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허물을 용서해 주신 주님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했는지 이후, 주님을 위해 살며, 기꺼이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쉽게 미워하는 이유는 상대방에게 허물을 먼저 찾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결점은 있게 마련입니다. 때문에 허물을 덮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패한 이유는 타인의 허물을 덮어 주기보다는 폭로하기 때문입니다.

(롬13:8)“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사랑의 빚은 누구나 다 갚을 수 없는 부채입니다. 누구나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저도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교회와 성도들로부터 끊임없이 빚을 지고 살아가 가고 있습니다. 언제 다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빚은 경제적인 빚을 갚는 것과 다릅니다. 경제적 빚은 당사자에게 갚아야 하지만 사랑의 빚은 당사자를 포함, 당사자가 아닐 수 있습니다. (마10:42)“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사랑의 빚은 대상과 방법에 제한이 없습니다.

바울은 사랑의 빚을 복음으로 갚았습니다. (롬1:14-15)“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선교사는 하나님께 받은 사랑의 빚을 타민족에게 갚는 자들입니다. 우리 또한 받은 사랑의 빚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갚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에게 빚진 마음을 물질로 갚았습니다. (빌4:14)“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보내온 선교비에 대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드린 헌금이 어떻게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됩니까? 돈이란 쓰고 싶은 욕망, 즐기고 싶은 욕망이 있는데, 이 같은 욕구를 극복하고 드렸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내 너를 위하여” 1절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3절“죄 중에 빠져서 영 죽을 인생을 구하여 주려고 나 피흘려 내 죄를 대속 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성도여러분! 우리가 지금까지 살면서 부모와 이웃, 하나님께로부터 진 사랑의 빚을 남은 삶 동안 갚으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나의 남은 시간은 받은 은사를 잘 사용하며 살아야 한다.

(10절)“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청지기”란 주인대신 재산을 관리하는 자를 말합니다. 우리가 받은 것, 누리고 있는 것 모두 주님으로부터 잠시 위탁받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단 한 번도 우리에게 소유권을 인정한 곳이 없습니다. 철저하게 위탁받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위에 사는 동안 주님께서 주신 것은 사용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이 땅을 떠날 때에 그대로 두고 갑니다. 재산도, 명예도, 권력도, 생명도, 시간도, 내 것이 아니라 주신 것입니다.

열왕기하 20장에 유대 13대 히스기야 왕이 죽을병에 걸렸지만 간절히 기도함으로 15년 생명을더 연장 받았습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살게 된 히스기야는 오히려 교만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바벨론을 더 의지하였습니다. (대하32:25)“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리게 되었더니

무엇보다 히스기야 왕이 15년 더 살면서 일어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므나세의 출생입니다. 히스기아가 죽을병에서 나은 지 3년 뒤, 42세에 므낫세를 낳았습니다. 불치병에서 나음을 받은 후, 아들을 얻었으니 얼마나 소중했겠습니까?

그렇지만 므낫세는 훗날 왕이 되어 55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면서 아버지가 제거했던 우상과 신당을 다시 세웠고 자식들까지 우상의 제물로 삼아 불로 태워 바치며, 온갖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므낫세”란 “잊어버리다.”란 뜻으로, 정말 그의 아버지가 행한 선한 모든 일을 잊어버리고 악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금번 튀니지를 방문했는데, 놀라운 것은 제가 방문한 튀니지에까지 므낫세가 “자식을 불로 태워 받친 제단과 약 2만 명의 어린아이들이 제물이 된 무덤”을 보고 왔습니다. 자식을 제물로 바칠 때마다 비석을 만들어 세웠는데, 이런 돌 비석이 무려 2만여 개가 동굴 안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기적적으로 얻은 15년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바로 살지 못했고, 무엇보다 자식을 믿음으로 바로 키우지 못했습니다. 히스기야는 자녀를 사랑하고, 소중하게 양육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가장 사랑하는 길은 바른 믿음 위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비행기가 이륙 후 어느 지점에 다다르게 되면 연료가 부족해 다시 출발지로 돌아갈 수 없는 지점을 “귀환불능지점”이라고 합니다. 사업이나 공부도 얼마간 하다가 적성에 맞지 않으면 다른 사업이나 학과나 진로를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처음부터 “귀환이 불가능”합니다.

존 웨슬리는 “만약 내일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신다면 지금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라는 질문에 그의 답변은 “지금까지 살아 왔듯이 하던 일을 그대로 할 것입니다.”라고 대답 했습니다.

우리는 과거와 달리,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정신을 똑 바로 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사랑의 빚을 갚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주님이 우리 각인에게 맡겨 주신 은사를 바로 사용하는 청지기로 사는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