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 로마서 2 : 1-5, 17-22
제목 : 사람이 인정하기 싫어하는 죄
- 10.25 (종교개혁주일)
오늘은 개신교회들이 종교개혁 주일로 지키는 날이며, 루터가 독일과 유럽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498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종교개혁 운동”은 로마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하였을 때에 1517년 마르틴 루터를 중심으로, 크게 3가지를 개혁한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Sola Scriptura), “오직 은혜로만”(Sola Gratia),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 돌아가자.”(Sola Fide)라는 개혁 운동이었습니다.
“종교개혁운동”은 루터가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이미 성경에 히스기야 왕과 요시야 왕이나 느헤미야, 에스라 등 개혁 운동을 하였습니다. 종교개혁 운동은 과거에도, 지금도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일어나야할 운동입니다. 그 이유는 지상교회는 세상 가운데 있기에 본질을 잃어버리거나 부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498주년을 맞이하여 본문을 가지고 “사람이 인정하기 싫어하는 죄”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남을 정죄하면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습니다.(2:1-4)
로마서 1장은 세상 사람들이 짓는 죄에 대해 기록한 것으로, 매일 신문과 방송에서 보도되고 있는 범죄들과 법정에서 다루고 있는 죄들이 로마서 1장 안에 모두 들어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반면, 로마서 2장은 하나님의 백성, 특히 유대인들이 짓는 죄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유대인들은 남을 판단하면서 그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는 이유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자기 의로움을 나타내기 위해 남을 정죄합니다.(눅18:11-12)“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바리새인들은 상대를 비판하면서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었습니다.
자기 허물과 약점을 덮고, 정당화하기 위해 남을 비판합니다. 마리아가 삼백 데나리온의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을 때에 제자들이 “이 향유를 왜 허비하느냐,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겠도다.” 책망하였습니다.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드림으로 제자들은 상대적으로 초라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헌신이 곱게 보이질 않았습니다.
(요8:1-11)“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현장에서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정죄 하려고 할 때에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거기에 몰려 왔던 사람들이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하나 둘씩 돌아갔습니다. 이 같은 주님의 교훈은 어느 누구도 남을 비판할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갈릴레이(1564-1642)는 “코페르니쿠스”와 지동설을 주장한 이탈리아 물리학자입니다. “지동설”이란 “우주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며, 태양을 중심으로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이 공전한다.”는 이론입니다. 당시에는 우주의 중심이 지구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로마교황청은 갈릴레이에게 지동설은 종교적으로 이단적인 행위이므로 철회하라고 강요했지만, 철회하지 않자 로마 교황청은 그를 종교재판에 넘겨 처형시켰습니다. 갈릴레이는 처형장에서 “그래도 지도는 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갈릴레이가 세상을 떠난 지 약 350년이 지난, 1999년 6월7일 교황, 요한 바오르 2세가 자신의 고국인 폴란드를 방문해, 폴란드가 낳은 위대한 과학자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지동설의 업적을 배척한 것을 공식적으로 사과하며, ”교황청은 갈릴레이가 주장한 지구가 돈다.”라고 주장하므로 정죄하여 재판한 것은 교황청의 잘못임을 인정한다.
또한 1997년 요한바오르 2세는 로마교회가 2천 동안 저지른 죄와 과오를 인정하며 사과했습니다. “우리 로마교회는 2000년 교회사에서, 큰 바빌론이었으며, 땅의 창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였으며, 땅의 왕들을 다스린 만행이 충분했다. 로마 카톨릭은 1208년에 프랑스에서 1만 명을 살해했고, 1237-1342년 이태리에서 1만 명 왈덴 시안을, 1421년에는 수천 명의 후스 파를 살해했다.
1546년에는 독일에서 5만 명을, 1572년에는 프랑스에서 8만 명, 1567년에는 네덜란드에서 수천 명, 1631년에는 독일에서 2만 9천명, 1641년에는 아일랜드에서 10만 명, 1685년에는 프랑스에서 4만 명 등, 어린 아이에서부터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살해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을 종교재판에 넘긴 것, 2차 세계 대전에서의 유태인 학살 등을 숨기고 바티칸에 있는 병든 노인의 “제스츄어”는 거짓말임이 분명히 드러난다. 오직 용서만이 기독교도가 화해할 될 수 있음을 확신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마7:1-2)“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우리에게 정확히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다. 사람은 한계 때문에 그릇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고전4:3)“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라” 비판은 나의 영역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것입니다.
- 자신은 회개치 않으면서, 회개하라는 말을 싫어합니다.(2:5)
성도와 세상 사람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죄를 짓고 난 후 핑계하는 대신 회개합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정당화하는 것이 다릅니다. 누구보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지 않았고, 회개하라는 말을 듣기 싫어했습니다.
(5절)“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바울은 회개치 않는 것은 “진노를 쌓는 것”이라고 하였지만, 그들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는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애굽 바로 왕은 재앙이 내릴수록 강퍅해 졌습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위대한 순간은 골리앗을 죽였을 때가 아니라, 나단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도둑이 바로 당신이오.”라고 했을 때, 변명하지 않고 회개 했을 때입니다.
(시6:6)“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다윗은 하나님을 속이고 업신여긴 죄 때문에 밤마다 침상이 젖도록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윗은 회개함으로 영혼이 살게 되었고, 더 겸손한 왕이 되었고, 성군이 되었습니다.
독일 교회 종탑에는 십자가 모양과 닭 모양의 조각이 있습니다.
독일 교회는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고 닭 울음소리를 듣고 회개했다는 성경 구절을 근거로 십자가 대신 닭을 새겨놓았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한 배반의 죄 때문에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베드로의 회개의 눈물은 하나님께 향기로운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것이 회개의 눈물입니다. 자신의 죄로 인하여 회개의 눈물을 흘린 경험이 있다면, 그는 죄 용서의 기쁨도 가져본 사람입니다. 자신의 죄의 심각성을 알고 눈물을 흘릴 때, 그 죄는 깨끗이 씻어진 것입니다. 성자가 죄를 짓지 않는 자가 아니요, 죄를 늘 회개하는 자입니다.
베드로가 회개의 설교를 하였을 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래 맞다 바리새인들이 회개해야 한다, 그래 맞다 제사장들이 회개해야 한다.”하고 하지 않았습니다. (행2:37-38)“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하거늘” 자신의 죄를 울부짖었습니다.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자가 복된 자입니다.
- 율법을 가르치면서 율법을 범한 죄를 인정하기 싫어합니다.(21-23절)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21-23)“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이 여기는 네가 우상을 도둑질 하느냐”
세상에서 가장 법을 잘 아는 사람은 법을 만든 사람과 법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즉 변호사나 판사, 검사, 법학교수 등 법조인들입니다. 그들은 죄의 형량이나 죄가 큰 것인지 작은 것인지 모두 압니다. 나아가 법을 피해서 죄를 짓는 방법도 잘 압니다. 유대인은 율법을 알고, 가르치면서 율법을 피해 이중적인 죄를 지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이중적인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하신 이유는 율법교사가 던진 질문에 대해 답변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눅10:29)“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질문의 의도는 자기를 옳게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잘난 척, 의로운 척 보이기 위해 한 질문입니다. 질문의 내용은 좋지만 의도는 아주 나빴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제자들에게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하신 이유입니다.
비유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이 가장 먼저 강도 만난 자를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만약 우리가 “제사장님 왜 이 사람을 모르는 척 하고 지나갔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아마 “저는 지금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기 때문에 지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또한 “레위인에게 당신은 왜 강도 만난 자를 보고 그냥 지나갔습니까?” 묻는 다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 제가 맡은 일이 많아 그냥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답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12:7)“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배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옳습니다. 그러나 참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자비와 긍휼”을 잃어서도 안 되지만, 무엇보다 예배를 앞세워 자신의 책임을 회피해서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제사장님, 레위인 좀 더 솔직하게 대답해 주십시오!” 한다면, “사실은 귀찮고, 책임지기 싫어서” 이것이 정확한 대답일 것입니다.
우리 삶에도 하나님과 교회, 믿음을 핑계하여 책임을 회피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예배를 핑계하며 자기를 방어합니다. 바로 종교적인 가장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기념 주일입니다. 개혁이란 잘못을 고친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허물을 덮기 위해 남을 비판하기 쉬우며, 사람은 자신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남의 허물을 정죄하기 쉽습니다. 남을 가르치면서, 자신은 바르게 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의 허물과 약점을 덮어 주는 대신, 겸손히 자신의 허물과 부족함을 깨닫고 채워가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