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1일 주일 설교 원고 / 우리가 정복해야 할 봉우리

성경 : 누가복음 4 : 38 – 44

제목 : 우리가 정복해야 할 봉우리                                            2015. 10.11

지구상에 해발 8,000m 넘는 산이 14개 있습니다. 이것을 “14좌”라 부릅니다. “14좌”는 모두 히말라야 산맥과 카라코람 산맥(네팔, 중국, 파키스탄)에 위치합니다. “14좌”를 가장 먼저 등반한 사람은 이탈리아 “라인홀트 메스너”가 1986년 완등에 성공했습니다. 한국은 2001년, 박영석씨가 “14좌” 완등 했고, 스페인에서는 2010년, “에두르네. 파사반”이 “14좌” 완등에 성공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14좌” 등정에 도전하고 있지만, 대부분 중도 포기하거나 죽음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산 의학자들은 “14좌” 봉을 “죽음의 지대”라 불렀고,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산(8.850m)을 등정했던 텐징은 “어떤 새도 넘을 수 없는 산”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14좌” 봉보다 높고, 넘기 어려운 “3좌 봉”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3좌 봉”을 정복하셨고, 우리에게도 “3좌 봉”을 정복할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정복해야 할 “3좌 봉”이 무엇인가 함께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율법주의” 라는 봉우리를 정복해야 한다.

본분은 마태(8장), 마가(1장)복음에서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만약, 주님이 회사의 사장이셨다면 “최악의 리더”로 평가될 만합니다. 주님은 아침부터 해 질 무렵까지 하루 종일토록 일하셨습니다. 31절, 안식일에 가버나움 동네에서 가르쳤고, 33절, 회당에서 귀신들린 자를 고치셨고, 38절 다시 회당에서 시몬의 집으로 가셨어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루 일이 끝날 저녁 무렵, 또 다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40절)“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제자들은 베드로의 장모의 병을 고침으로, 하루 일과가 끝날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베드로 장모의 병을 고쳤으니, 식사 대접을 해 주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해질 무렵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미완료 동사로 “계속 병자를 데려오는 중”이란 뜻입니다. 마가복음에는 (3:20)“식사할 겨를도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취업포털 “사람인”에서 “가장 다니고 싶은 꿈의 직장이 무엇인가?”를 조사한 결과, “퇴근시간이면 컴퓨터가 자동으로 꺼지는 칼 퇴근하는 직장”이라고 답변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주님은

“최악의 리더”임에 분명합니다. 주님은 어느 목사님보다, 기업인보다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해질 무렵에 몰려왔습니까? 낮에는 일을 하느라 바빴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늦게 받았기 때문입니까?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안식일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저들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 주신 것인데, 오히려 안식일이 그들에게 올가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린 것입니다. 저들은 아픔을 참고, 아픈 사람을 보면서 해가 질 때 까지를 기다린 것입니다. 저들에게 안식일은 그냥 빨리 지나 가길 바랐던 날에 불과했습니다. 억매이고 속박하는 날일뿐이었습니다. (눅6:7)“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안식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도록 손발을 묶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안식일에 가르치며, 병을 고치면서 (눅6:9)“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내 손을 내밀라 하시니 손이 회복된지라.” (눅6:5)“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율법주의는 율법을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보다 우선시 할뿐 아니라 율법에 종노릇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오늘날 주일과 우리가 맡은 직분이 올가미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시간과 물질, 달란트를 드리고 사용하는 것이 부담스럽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율법에 얽매여 억지로 나와 예배하고, 형식적으로 봉사하고, 직분을 감당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바울은 서신서,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핵심적으로 다룬 주제가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만큼 무서운 적도 드물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율법보다 중요한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5:23-24)“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것은 형식적 예배보다 삶이 중요하며 자신의 의보다 부족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욥의 믿음도 처음에는 순전했지만, 고난 가운데서 약해졌습니다. 다윗도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칭찬 받았지만 하나님의 마음에서 크게 벗어나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열심도, 믿음도 변하기 쉽습니다. 우리의 믿음 또한 형식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이기주의” 라는 봉우리를 정복해야 한다.

주님이 저녁 늦게까지 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피곤하셨겠지만,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기도로 시작하셨습니다. (42절)기도를 통해 새 힘을 공급받기 위해서입니다. 기도 없는 삶, 기도로 무장하지 않는 하루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치유를 목격한 가버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이 떠나지 못하게 만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독점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43절)“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가버나움 사람들은 주님이 더 머물면서 병을 고쳐 주길 원했지만, 주님은 단호하게 거절하고, 그곳을 떠나가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은 가버나움에서 많은 이적을 행했지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마11:23-24)“가버나움아…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바울과 바나바가 1차전도 중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았을 때 (행13:51)“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또한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훼방을 받자 (행18:6)“바울이 옷에 먼지를 떨어 가로대 너희 피가 너희에게도 돌아갈 것이요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하였습니다.

강줄기를 따라 흘러가는 물을 막으면, 물은 넘쳐 다른 곳으로 흘러가듯, 복음 또한 막으면 다른 곳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있자 사도 외에 모든 사람들이 사마리아와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 복음을 받지 아니하고 박해했을 때, 그 복음은 이방인에게로 넘어간 것이 성경원리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받은 복음은 값싼 것이 아닙니다. 값비싼 대가를 지불함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7:6)“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오래도록 기도하고, 힘썼는데도 계속적으로 거부합니다. 개인적으로 안타깝고 낙심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아주 놀라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마10:23)“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마10:14)“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 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주님은 복음을 반복적으로 거부하면 발길을 돌릴 뿐 아니라, 발의 먼지까지 털어 버리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사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가버나움 사람들이 이적과 질병을 고침 받는 것에만 관심을 둔 이기적인 가버나움을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습니다. 지금 시대는 불행하게도 복음은 유럽을 떠났고, 한국 또한 복음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복음은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중국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교회도 세계 선교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3. “집단주의” 라는 봉우리를 정복해야 한다.

(40절)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막1:32-33)“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온 동네”가 모인 것을 보면, 그 숫자는 엄청나게 많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모든 병자들을 한 사람씩 일일이 어루만지며 고치셨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사람을 집단적으로 대하지 않으시고, 개별적으로 대하셨습니다. 사람이 가장 기분 나쁜 것 중 하나는 사람을 집단적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제가 군에서 가장 먼저 들은 말입니다. “지금부터 너희들은 사람이 아니고, 군인이다. 군인은 사람이 아니다. 군인은 주는 대로 먹고,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지급한 옷에 여러분들의 몸을 맞추어 입고, 지급한 신발에 여러분들의 발을 맞추어 신으라.”

“내가 알고 있는 스페인 사람이 게으르다고 스페인 사람은 게으르다.” 말한다면, 스페인 사람들이 얼마나 기분 나빠 하겠습니까? “내가 모로코 사람에게 소매치기 당했다고 모로코 사람은 모두 도둑이다.”라고 욕한다면, 모로코 사람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모로코에 가보면, 모로코 사람은 아주 온순한 양과 같이 착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개별적인 만남을 인격적인 만남이라 합니다. 주님은 수많은 병자들과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집단적으로 대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대하여 주셨습니다. 성경은 삭개오, 세리 마태,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나 하나만이 당신의 사랑하는 자인 것처럼 사랑하신다.”라고 하였습니다.

(엡2:10)“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원문 “포이에마”란 말로 “걸작품”이란 뜻입니다. 벽돌은 작품이 아닌 상품이지만, 저와 여러분은 상품이 아니라, 걸작품입니다. 우리는 각기 다른 역할과 능력,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존중히 여기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아픔을 과소평가하지 않아야 하며,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사정을 외곡하지 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개별적으로 대하시고, 관심을 갖고 게시는 분이십니다.

율법주의는 사람의 마음 가장 자리를 차지하고 우뚝 서있는 큰 봉우리와 같습니다.

이기주의는 사람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박혀 있는 큰 봉우리와 같습니다.

집단주의는 사람의 마음 가장 넓게 갈려 있는 크고 작은 봉우리와 같습니다.

우리는 세 종류의 봉우리를 정복하지 않으면, 우리 또한 바리새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 개의 봉우리를 정복하는 믿음의 승리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