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4일 주일 설교 원고 / 지혜로운 자의 입과 발 그리고 눈

성경 : 잠언 16 : 23 – 30
제목 : 지혜로운 자의 입과 발 그리고 눈 2015.10. 4
지난 주간 집사람이 제 서재에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누구와 전화를 했는지 잘 모르지만, 전화 중에 책상 앞 메모지에 이런 낙서가 적혀 있었습니다. 바둑판 그림을 그려 놓은 후, 칸 마다 바둑돌 같이 새까맣게 동그라미를 쳐 놓고, “점심”이란 글자를 여러 겹 반복적으로 써 놓았습니다. 아래 부분에는 “코레”, “10Cm”, “감”이란 글자를 써 놓았습니다.

프랑스 범죄 영화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경찰은 살인사건의 범인이 자신의 집에서 전화를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남긴 “어린이 얼굴이 그려진 메모지”를 근거로 범인을 잡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평소 깊이 생각한 것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서 무의식으로 표출된다는 말입니다.

본문에 지혜자는 사람에게 소중한 입과 발과 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을 통해 “그 사람의 감정 여부를 알 수 있으며”, 그가 가는 곳을 통해 “그의 관심을 알 수 있으며”, 그리고 눈을 통해 “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은 지혜자가 우리에게 입과 발, 그리고 눈에 대하여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지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나의 입, 어떻게 사용하십니까?
잠언에는 말에 대한 교훈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 가운데 필요한 말, 유익한 말도 있지만, 때로 불필요한 말, 심지어 해서는 안 되는 말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 한마디로 많은 상처를 받기도하며, 주기도 합니다. 말로 받은 상처가 오래갑니다. 그러기에 지혜자는 (24절)“선한 말은 꿀 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교훈한 것입니다.

“데이”라는 사람은 “세 황금 문”이란 글에서, 말을 하기 전에는 반드시 세 황금 문을 지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첫째 문은 “그 말이 필요한가?” 둘째 문은 “그 말이 진실한 말인가?”, 셋째문은 “그 말이 친절한 말인가?” 이 세 문을 지나, 네 입에 왔거든 크게 외치라고 하였습니다.

의사들이 우리가 사용하는 입은 기분이 좋으면, 입이 커지면서 입 꼬리부분이 올라가고 반대로 기분이 좋지 않고 걱정이 많으면, 입이 작아지고 입 꼬리 부분이 아래로 내려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입이 작아지는 것과, 꼬리 부분이 내려오는 것은 별로 좋은 현상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살면서 언제 입이 작아집니까? 남을 흉볼 때 입이 작아집니다. 남을 속이거나 본문(28절)“친한 벗을 이간할 때” 입이 작아집니다. 또한 억울한 일과 슬픈 일을 당하였을 때 입이 작아집니다. (시32:3)“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반면, 언제 입이 커집니까? 기쁠 때, 확신이 있을 때, 입이 커집니다. 또한 위급한 상황을 만날 때 “입이 커집니다.” 성경에 “고통 중에 부르짖으매”, “크게 소리 지르매” 란 말씀이 수백 번이나 언급되고 있으며, 특히 욥기와 시편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거지 소경 바디매오는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라는 말을 듣고”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바디매오는 비록 앞을 보지 못했지만, 없는 것을 탓하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극대화했습니다. 바디매오에게 있어 귀와 입이 보배였습니다.

학교에서 영어를 배울 때, 가장 많이 하는 발음은 “아 애 이 오 우” 5개모음입니다. 모음 가운데 가장 입 모양이 가장 큰 것이 “아”입니다. 치과에 가면, 의사가 환자에게 “아” 해보라고 합니다. 여자 분 중 출산할 때 “애, 이, 오, 우”라고 하신 분 있습니까? “아, 아”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아 -”로 시작되는 말이 어떤 것이 있습니까? “아멘-”, “아버지”, “아버지!”라고 부를 때 입이 가장 넓게 열어집니다. “아버지”를 자주 불러야 합니다. (시81:10) “입을 크게 열라, 넓게 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치과 의사도 아닌데 “입을 크게 열라”고 하십니까? “입을 크게 열라, 넓게 열라.”란 “크게 부르짖으라.” “크게 외쳐라.”는 뜻입니다.

(시120:1)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어미 새가 둥지에 있는 모든 새끼들에게 골고루 먹을 것을 나누어 먹이지만, 그럼에도 입을 크게 벌린 새끼에게 더 많이 주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병원에서도 크게 부르짖는 환자를 우선적으로 돌보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가 간절하게, 크게 부르짖을 때, 다급해서 빨리 돌보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여러분의 필요가 아무리 커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다 채우시고도 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입이 작아지거나, 꼬리가 내려가지 않고, 크고, 꼬리 부분이 올라가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2. 나의 발,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25절)“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발걸음은 행동을 의미하며, 길은 인생의 방향을 말합니다. 우리 인생은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어디론가 향해 가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흰 눈이 왔을 때, 앞으로 달려 나가 본 적이 기억날 것입니다. 한 참 달린 후에 뒤를 돌아보면, 발자국이 꾸불꾸불 해 있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바르게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이 없듯이, 우리 인생의 길 역시, 스스로 바르게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길을 가다가 모르면 “이 길이 맞습니까?” 라고 물어 보듯, 인생의 길 또한 물어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 자신이 가고 있는 길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요14:5)“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도마는 의심을 가진 제자이긴 했지만, 진리에 대하여 알고자하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잘 모르면서 체면이나, 부끄러움 때문에 그냥 지나가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주님은 도마의 질문에 답해 주셨습니다. (6절)“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원문에는 “그 길, 그 진리, 그 생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만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란 뜻입니다.

세상에 있는 대부분의 종교는 자신이 스스로 길을 찾아갑니다. 찾아가는 방법도 모두 다릅니다. 지난주 이슬람교도들이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 순례 왔다가 사고로 천명이상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슬람교는 구제, 성지순례, 기도, 선행을 통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불교, 힌두교도 스스로 노력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찾아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려오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반복되는 말씀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성육신” 사건, 즉 기독교는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려오신 것입니다.

(행4:12)“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기독교는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으며, 하나님께로 갈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대 전제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고행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루에도 수십 번 무릎을 꿇고, 교회당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고행, 금식, 기도하였지만,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는 말씀을 깨닫고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세상에 있는 길은 혹 잘못 가더라도 얼마 지나면 다시 돌아올 수 있지만, 잘못 간 인생의 길은 다시 돌아올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먹고 살만한데 세상을 비관하며 불행하며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거나 사회적 지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잘못된 길을 가는 자입니다.

잘못된 길을 가는 인생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 주고 안내해 주는 것이 전도입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들이 잘못된 길에서 생명의 길로 가도록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고, 선지, 사도들이 죽기까지 하며, 그 길을 안내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바르게 알리고 전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3. 나의 눈, 무엇을 보고 있는가?
스페인이 자랑하는 화가 “엘 그레코”의 대표 작품으로 “성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과 “엘 엑스폴리오”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대성당에 전시되어 있는 “베드로의 눈물”이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엘 그레꼬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막14:20)“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이 작품을 그렸습니다.

베드로는 닭이 두 번 우는 소리를 듣고, 그제야 “내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구나!” 란 사실을 알고, 허공에 싸인 하늘을 바라보는 커다란 눈망울에서 스승을 배반한 죄스러움과 슬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두 눈에서 빼어나오는 눈물을 통해서 극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엘 그레꼬는 베드로의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통해서 “베드로의 회개”를 표현한 것입니다.

(30절)“눈짓을 하는 자는 패역한 일을 도모하며 입술을 닫는 자는 악한 일을 이루느니라.”여기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가롯 유다입니다. 가롯유다가 예수님은 대 제제사장에게 넘겨 줄때에 입을 다문 채, 눈짓으로 거래를 성사 시켰습니다.

얼굴이 1000냥이면 눈이 900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눈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바깥세상에서 받아들이는 정보는 80%가 넘으며, 대화도 말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마지막은 말이 아닌, 눈을 통해 사실 여부를 판단합니다.

의사들이 맨 처음 환자를 진단할 때를 보면, 환자의 눈을 통해 건강 여부를 확인하듯 주님께서도 그 사람의 눈이 그 사람의 영적 건강을 측정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6:22-23)“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성하다”라는 뜻은 “정확하다.”라는 뜻이며, “나쁘다”라는 뜻은 “초점이 흐리다”는 뜻입니다. 즉 “난시”란 뜻입니다. 난시는 초점이 흐려 사물이 겹쳐서 보이는 현상을 말합니다. 영적으로 “눈이 흐리다.”라는 것은 세상에 있는 갖가지로 인해, 진리를 바로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롯 유다는 돈에 눈이 가려져 예수님을 은 30정도로 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입을 바르게 사용키 위해 (시141:3)“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바른 길을 행하도록 하기 위해 (시119:11) “내가 주께 범죄 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그리고 그의 눈은 (시27:4)“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오늘 지혜자는 우리의 입과 발, 눈을 바르게 사용하도록 교훈해 주셨습니다. 우리 또한 다윗과 같이 우리 입술에 파수꾼을 세우도록 기도해야 하며, 주의 말씀을 마음에 두어야 하며, 우리의 눈은 여호와를 사모하고 바라보며 사는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