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30일 주일 설교 본문 / 사랑의 속성

성경 : 요한 1서 4 : 7-15

제목 : 사랑의 속성

  1. 8.30

세상에서 “사랑” 만큼 많이 사용하는 말도 없으며, “사랑”만큼 많이 다룬 주제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세상에서 통용되고 있는 사랑은 대체적으로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 “조건부적 사랑”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해주면 나도 너를 사랑할 수 있다.” 우리가 가장 많이 접하고 있는 사랑 중에 하나로, 조건이 따라 주지 않으면 깨지는 사랑입니다.

둘째, “때문에 사랑”입니다. “당신이 멋있기 때문에 사랑 한다.” “당신이 나를 행복하게 해 주기 때문에 사랑한다.”상황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황이 바뀌면 사랑이 끝나는 관계입니다.

세 번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입니다. 어떤 조건이나 상황에 관계없는 사랑입니다.

성경 중에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한 두 곳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과 요한일서 4장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의 의미를 나타낸 것이라면, 요한일서 4장은 사랑의 속성과 성격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사랑의 속성”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합니다.

  1. 우리에겐 사랑의 실체가 없다.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사랑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즉, 사랑의 속성은 “사랑은 받아야만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요일4:7)“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달이 태양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것처럼, 우리도 스스로 사랑을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받은 사랑을 그저 줄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대한 실망감이나 아픔을 갖고 있습니다. 부모들은 자녀에 대해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자식 키워 아무 소용없다.”라고 말합니다. 남녀 사이에 “언제는 죽을 듯 사랑한다 해 놓고 이제와 헌신짝처럼 버리다니” “달면 삼키고 쓰면 내 뱉는다.”라는 말들을 합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까?

나에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뿐 아니라, 줄 수 있는 사랑이 소진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마치 전력이 소모된 배터리와 같은 상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적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배터리를 계속적으로 충전해야 하듯, 사랑도 계속적으로 충전 받아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사랑을 충전 받을 수 있습니까? (4:12)“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이것이 사랑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내가 사랑을 보충하고, 나에게 사랑을 머물 수 있게 하는 방법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 때에 “사랑을 받기만 하고, 주지 않는 것은 상대의 죽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요한은 이런 이유 때문에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10여 차례나 강조했고, 성경은 시도 때도 없이 “서로 사랑하라.” “피차 사랑하라.” “선을 베풀라”, “주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남을 위한 교훈이 아니라 모두 자신을 위한 말씀입니다.

얼마 전, 집사람이 매일 아침 요구르트를 만들어 마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유 한 컵에다 몇 방울의 요구르트를 붙고, 하루만 두면 모두 요구르트로 변하는 원리를 이용한 것입니다. 몇 방울의 요구르트가 아주 많은 요구르트를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이, 작은 사랑을 서로 주고받을 때, 지속되고, 소멸되지 않고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사랑에 실패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가 스스로 사랑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이 말씀은 “너희에게는 사랑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첫 번째 말씀을 가지고 공식을 만든다면 다음과 같이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받은 것만큼 할 수 있고, 사랑은 준 것 만큼 할 수 있다.”

성도여러분! 내가 부모를 어떻게 계속 사랑할 수 있습니까? (4:12)“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내가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을 까먹지 말고, 되돌려 드리면 됩니다. 내가 아내와 남편을 어떻게 지속적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까? “서로 사랑하면 됩니다.”, “받은 사랑을 되돌려 주면 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감사”란 “받은 은혜와 사랑을 되돌려 드린다.”라는 뜻입니다. 감사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삶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가운데 계속 머물도록 하는 길입니다. 우리 모두 서로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통해서 우리 속에 사랑이 고갈되지 않고, 풍성할 수 있길 바랍니다.

  1. 사랑이 시작된 곳은?

스페인에서 가장 큰 두 개의 강이 있습니다. “따오 강”과 “에브로 강”입니다. 따오 강은 마드리드 위쪽에서 포르투갈을 통과하여 대서양으로 흐르며, 길이는 1038 km나 됩니다. 에브로 강은 북쪽 칸타브리아 지역에서 사라고사를 거쳐 또르또사를 지나 지중해로 흐르며 길이는 925km입니다. 모든 강은 수원지에서 시작됩니다. 강물은 수원지를 통해서 흘러갑니다.

마찬가지로 사랑도 시작되는 곳이 있습니다. “사랑의 수원지”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랑이 시작된 곳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0절)“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먼저 “사랑은 여기 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가 어디 입니까? “화목 제물”이란 십자가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출발한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모든 성경 저자들은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최상의 것으로 선택한 단어가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시작된 곳이 십자가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시작된 곳이며,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시작된 수원지입니다. 때문에 바울은(갈6:14)“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 할 것이 없다.” 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라고 했을 때, 적어도 세 가지를 꼭 기억해야만 합니다. 세 가지 중 하나만 빠져도 십자가와 상관이 없습니다. 첫째, 용서입니다. 용서가 없는 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생각할 때 용서를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십자가에는 용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종교들도 병을 고치며, 물질의 축복도 주기도 합니다. 때로 마음의 평안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코 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죄 용서”입니다. 죄 사함은 “예수님의 십자가”로써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마저 용서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를 통해 용서해 주셨습니다.

둘째, 십자가는 구원의 표시입니다. (고전1: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셋째,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표시입니다. 십자가는 저와 여러분의 죄를 용서한 증거물이며,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한 증거물이며, 십자가는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가장 사랑한 증거물이며, 십자가는 죄인을 향한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과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으며, 어떻게 십자가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까? (15절)“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 말씀에서 “사랑은 믿음을 통해서 공급된다.”는 공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랑과 믿음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분리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저 사람은 믿음은 있는데, 사랑이 없다.”라든지, “저 사람은 사랑은 있는데, 믿음은 없다.”라는 말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 사랑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변질 된 것은 그 사랑이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뿌리를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풍성한 사랑은 확고한 믿음위에서 생산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바로 믿어야 합니까?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밀턴은 그가 쓴 장편 서사시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을 “실낙원”이라고 했고,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한 것을 “복낙원”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을 보존하고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소유하시길 바랍니다.

  1. 사랑만이 죽음과 심판을 이길 수 있다.

오늘 우리들에게 많은 두려움들이 있습니다. 질병에 대한 두려움, 암과 같은 병에 걸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교통사고와 가난에 대한 두려움, 실직이나 사업의 실패, 인간관계에 대한 두려움, 이별에 대한 두려움, 친밀한 관계가 깨어질 것에 대한 두려움, 늙음과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 그 외에도 수많은 두려움들이 우리를 엄습해 오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죽음보다 대한 두려움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죽음 앞에 정복되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어떤 영웅과 왕도 죽음 앞에서는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인생도, 죽음 앞에서 영웅도 왕도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17절)“사랑이…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했고, (18절)“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두려움을 내어 쫒는다.”

유대인의 지혜서인 “탈무드”에 “열두 가지 강한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돌은 강하다. 그러나 쇠에 깎인다. 쇠는 불에 녹는다. 불은 물로 끌 수 있다. 물은 증발하여 구름에 흡수당하고 만다. 구름은 바람에 날린다. 그러나 바람은 사람을 날려 보내지 못한다. 사람은 고민으로 파괴된다. 고민은 술로 달랜다. 잠은 술 보다 강하다. 잠도 죽음만큼은 이기지 못한다. 죽음은 강하다. 모든 것은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 그러나 죽음보다 강한 것이 사랑이다.”

(롬8:38-39)“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바울은 죽음을 이기고 정복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였고, (아8:6)“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죽음을 준비하고, 맞이해야 합니까? 우리가 적어도 하나님 앞에 설 때 두 가지를 꼭 붙잡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미 사망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다는 믿음과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사랑하고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랑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참된 사랑은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죽음을 맞이할 때 두렵지 않도록 십자가의 사랑을 붙잡고 살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를 죽음 앞에 설 때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