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일 주일 설교 원고 / 인생의 문제를 푸는 열쇠

성경 : 창세기 50 : 15 – 21

제목 : 인생의 문제를 푸는 열쇠                                                  2015. 8. 2

일을 잘하는 사람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일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물쇠를 열 때 힘으로 열지 않습니다. 열쇠로 엽니다.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오늘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오늘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또한 일을 잘하는 사람은 일의 시작과 끝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지혜자라고 말합니다.

본문에 소개된 요셉은 자신의 삶이 실타래와 같이 꼬여 있었지만, 복잡하고 꼬여 있는 문제들을 지혜롭게 잘 푼 사람입니다. 오늘은 요셉을 통해서 종종 해결되지 않는 어려운 문제들을 어떻게 지혜롭게 풀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인생의 문제는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보아야 풀립니다.

어떤 가정이 두 자녀와 함께 스페인에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큰 아이는 고등학교 3 학년이었고, 막내는 중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정착한지 두 달 정도 되었을 때, 큰 형은 학원에서 스페인어를 좀 배웠고, 막내는 스페인어를 전혀 배우지 못했습니다. 두 형제가 T. V.에서 영화를 함께 보았습니다. 그런데 동생은 영화 내용을 대부분 이해했는데, 형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 줄 아십니까? 동생은 이야기 줄거리를 중심으로 영화를 봤습니다. 예를 들어 “경찰관이 범인을 추격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화면이 바뀌어 절벽과 폭포수가 나타납니다. 영화를 잘 보는 사람은 절벽과 폭포수 장면만 보아도 그 다음 사건을 훤히 압니다. 동생도 말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폭포수를 보고, 곧 범인이 뛰어 내릴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형은 2개월 배운 스페인어로 영화 대사를 알아들으려고 신경을 쓰다 보니, 전체 스토리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영화가 끝난 후 형이 동생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폭포수가 아주 멋있었지, 폭포수가 아주 높았지?” 동생은 폭포수를 보고, 뛰어내린 범인이 살았을까, 죽었을까? 생각하느라 폭포수가 높은 것을 보지 못했지만, 줄거리를 모르니까 폭포수만 본 것입니다. 둘의 차이점은 형은 사건을 부분적으로 본 반면, 동생은 사건을 전체적으로 보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요셉의 인생은 참으로 험난했습니다. 어릴 때 어머니를 잃었고,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았고, 우물에 갇혔고, 죽음의 공포를 경험하였고, 17살 때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그뿐 아니라 성 추행범으로 몰려 감옥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요셉의 인생을 부분적으로 떼어서 본다면 절망과 낙담뿐이었습니다.

여러분! 어린이들이 좋아 하는 “레고”나 “퍼즐”이 상자 안에 들어 있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짝을 맞추면 멋진 그림이나, 훌륭한 작품이 되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레고와 퍼즐과 같이 부분적으로 보면, 떠여 내거나 버리고 싶은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을 전체를 볼 때에 불행한 부분마저도,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도, 인생을 부분적으로 본다면 실망하고 낙망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모세의 인생도 왕궁에서 40년만 떼 내어서 본다면, 그는 “호화 생활을 한 사람”일 뿐이며, 광야 40년만 떼 내어 본다면, 그의 고백같이 “40년을 허송세월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120년의 생애 전체를 볼 때, 비로소 그의 생의 위대한 점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을 짧게, 부분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길게 전체적으로 보아야합니다. 우리 인생을 10세 때, 30세 때나 인생에서 불행했던 때와, 암울했던 시기들만 떼어내어 이해한다면 누구나 실망할 수밖에 없겠지만, 전체를 보면 버릴 것이 없게 됩니다.

사진을 찍을 때, 빛과 어두움이 있어야만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어두움이 없을 때 사진을 찍을 수 없듯이, 우리 인생도 빛과 어두움이 함께 어우러져야 그려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그리시는 탁월한 화가입니다. 우리의 어두운 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완성해 가시는 분이십니다.

  1. 인생은 문제는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풀립니다.

우리말에 “전화위복”란 말이 있습니다. “화가 변하여 복이 된다.”는 말입니다. 교통사고가 나서 차가 망가졌고, 뼈가 몇 개 위골되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종합검진을 받았는데, 간암초기 라는 진단을 받아 조기에 치료할 수 있게 되는 경우입니다.

요셉의 삶은 한마디로 “악이 선으로 바꾸어진 삶”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20절)“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형제들이 요셉을 팔고, 사람들이 누명을 씌우고, 감옥에 넣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도리어 선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야곱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요셉이 행방불명되었고, 시므온마저 애굽에 인질로 잡혀 있었고, 거기에다 더 충격적인 것은 자신의 아들들이 막내 베냐민도 애굽으로 데리고 가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창42:36)“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야곱이 얼마나 괴로웠으면 자식들을 향해 “너희가 다 나를 해롭게 하는 자이다.”, (38절)“너희가 나를 스올(지옥)로 내려가게 한다.”고 까지 하였습니다. 어찌 부모가 이렇게 생각을 했겠습니까? 실제 야곱은 자식들 모두가 자신을 해롭게 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야곱이 참담하고, 비참하다고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좋은 일들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죽지 않았으며, 시므온은 애굽에 있었지만 신변에 아무 문제가 없었으며, 베냐민이 애굽으로 내려간다고 해도 해를 당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요셉이 총리가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야곱은 온 가족 75명이 함께 살게 될 것이지만, 이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너희는 다 나를 해롭게 하는 자이다.” 라고 한탄했습니다.

우리 또한 몇 가지 절망적이고, 어둡고 아픈 일들을 당했다고, 우리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하거나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하는 일마다 잘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 또한 야곱같이 “다 나를 해롭게 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곳이 아무리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외면하고 계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롬8: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지금의 것들을 통해 유익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습니까?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성도는 “다 나를 해롭게 하는 자이다.”라는 말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란 두 가지를 동시에 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 구절 가운데 하나만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 나를 해롭게 하는 자이다.”라는 것을 믿을 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취할 수 없으며, 반대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취할 때 “다 나를 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비록 아무런 꿈이나 계획도 없이 이곳에 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분명한 계획과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비록 실수로 이곳까지 왔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것을 선하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고 해도 그것마저 선으로 바꿀 수 있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 인생의 문제는 사랑만이, 해결할 수 있음을 믿을 때에 풀립니다.

요셉을 통해 “용서가 곧 사랑이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즉, 사랑이 없으면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로부터 숫한 모함과 해를 받았지만,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 가운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과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의 핵심은 “내가 먼저 주님으로부터 죄 용서함 받았다는 사실과 확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용서받았다고 생각할 때, 용서가 가능한 것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이미 용서받을 수 없을 만큼 큰 죄를 지었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모두 죽인다 해도 나무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모든 잘못을 용서했습니다. 창세기 45장에서 50장에 요셉이 형님들이 만나 대화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고받는 말속에는 구구절절이 요셉이 형님들을 “용서하는 마음”이 묻어 있습니다.

요셉 앞에 선 형제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지만, 요셉은 당신들은 나를 죽이려 하였으나 하나님이 용서하게 하셨다고 위로하였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알고 있었기에 먼저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라고 위로하였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이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이 선으로 바꾸셨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타인에게 두려움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부모 형제, 가족, 부부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데, 서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두려움의 존재가 아니며, 부부, 성도는 두려움의 존재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우리 주님은 자신을 희롱하며 비방하는 자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향해 (눅23:34)“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생각 할 때마다 무엇보다 용서를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용서가 없는 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사랑하는 이유는 용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는 수많은 종교들이 있지만, 그들이 결코 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 사함과 용서입니다. 죄 사함과 용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써 만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자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인생의 문제는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보아야 풀립니다. 인생은 문제는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풀립니다. 인생의 문제는 사랑만이 해결할 수 있음을 믿을 때에 풀립니다. 지난날 원한과 아픔 때문에 타인을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를 이곳으로 보내셨다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는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