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1일 주일 설교 원고 / 무너진 관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성경 : 요한복음 21 : 12 – 17

제목 : 무너진 관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1. 6. 21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무너진 베드로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이야기입니다. 베드로는 짧은 순간에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을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한 후 부인 했습니다. 베드로는 스스로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고 생각 했던지, 예수님을 멀리 떠나 옛 생활로 돌아가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무너진 관계는 결과적으로 “자포자기”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베드로를 찾아 오셨어 무너진 관계를 다시 회복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서로에 대한 관계가 수없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한 것으로 부모와 자녀, 부부, 친구, 이웃의 관계가 무너지게 되는 경험을 합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무너진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를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관계회복은 아픔을 직면하는데서 부터 시작된다.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히포크라테스는 혈액형에 따라서 사람의 기질을 4 종류로 분류했습니다. 다혈질과 우울질, 담즙질과 점액질입니다. 우울질은 감수성이 예민하여 매사에 진지하고 신중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며, 담즙질은 결단력이 강한 사람이며, 점액질은 낙천적이며,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며, 그리고 다혈질은 적극적이며, 감성이 풍부하며, 모험심이 강한 사람이 이에 속합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의 성격은 다양했습니다. 도마와 같이 무조건 의심부터 하는가 하면, 마태와 같이 즉시 순종하는 사람도 있으며, 또 빌립같이 계산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혈질적이고 급한 성격으로 베드로를 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기려 할 때 베드로는 (요13:8)“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라고 거절했습니다. 주님께서“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하자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라고 했으며,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셨을 때, 뒷일을 생각지 않고, 바다에 뛰어내려 살려 달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오늘 본문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마26:31) “오늘 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했을 때 베드로는(마26:33)“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고 장담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의심 많은 도마, 계산적인 빌립, 요한, 나의 동생 안드레마저도 주님을 버릴 수 있지만, 저는 아닙니다. 통제되지 않은 행동이 동료들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베드로의 최대 장점은 적극성과 열정입니다. 그에게 불타는 열정이 있었지만, 통제 되지 않은 열정이 관계를 무너지게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열정이 통제되지 않을 때 칼이 되고, 화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 주님은 베드로와 관계 회복을 위해 가장 먼저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15절)“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통해 과거 베드로가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고 한 말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그때는 우월한 생각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 때는 실수로 한 말이겠지만, 지금 다시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느냐?”고 하신 질문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지난 과거의 아픔을 통해서 다시 새롭게 회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관계 회복을 위해서는 지난 과거의 아픔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관계가 깨어 졌을 때에 큰 걸림돌은 지난 과거의 아픔을 부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애써 덮으려고 합니다.

베드로 역시 주님과의 관계가 깨진 이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생각하고 다시 고기를 잡으러 갔지만, 일에 몰두 할 수 없었습니다. (3절)“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여러분!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아픔을 직면하고, 아픔을 감수하고, 아픔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아픔을 인정하지 않을 때, “자포자기”“피해의식” “열등의식”을 떨쳐 버리지 못하게 됩니다. 사람은 자신의 부족과 허물을 통해서 인간의 한계를 경험하게 되고 겸손하게 됩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고, 더욱 관계를 소중하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무너진 관계를 회복시켜 다시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회복한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며, 회복한 장소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는 곳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회복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 관계회복은 말 한마디를 통해서 시작된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그것도 예수님이 보는 앞에서 말입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과 관계가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아! 이제 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구나!”, “이제! 더 이상 제자가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게 된 과정을 보면 처음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눅22:46)“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하기 전 “기도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에 작은 계집아이 앞에서 부인하였습니다. (57절)“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이후 여러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전혀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제 1차 선교여행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간 마가의 일로, 서로 다투었을 뿐 아니라, 제 2차 선교여행 때는 서로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바울은 “중대한 선교 사역에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중간에서 도중하차 한 마가를 더 이상 선교 여행에 참여 할 수 없다.”라고 원칙을 강조한 반면, 바나바는 “그럼에도 젊은 사람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더 주자!”라고 관용했습니다.

“원칙과 관용”의 문제는 오늘날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이기도 합니다.

아빠는 학교에 간다고 해놓고 극장 구경을 간 아들에게 밥을 주지 말고, 매를 맞아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엄마는 한번만 용서 해주자고 했을 때, 이것은 맞고 틀리는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입니다. 즉 아빠의 주장도 틀리지 않고, 엄마의 주장도 틀리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틀리지도 맞지도 않는 문제를 놓고 시간을 낭비하고, 다투고, 아파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대인관계가 깨지고 무너지는 것은 대부분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말 한마디, 눈빛 하나 때문에 관계가 무너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했는데 남편이 가만히 있다고 섭섭해 합니다. “나는 인사를 했는데, 다른 사람은 나에게 인사하지 않는다.” 이런 사소한 것으로 이 교회는 사랑이 없다. 라고 생각합니다.

“크리스틴 우드”의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먼 순례 길을 마치고 돌아온 순례자에게, 오늘날로 말하면, 800Km 산디아고 까미노 길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에게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순례 길에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뜨거운 태양, 갈증과 목마름, 추위, 외로움이었습니까?” 순례자는 아닙니다. “가파른 언덕길이었습니까?”“진흙에 빠졌을 때, 길을 잃을 때 입니까?”

그런 것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실 나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내 신발 속에 들어 있는 작은 모래였습니다.” 인간관계를 어렵고 힘들게 만드는 것은 큰 바위가 아니라, 신발 속에 모래와 같이 작고 조그마한 것들입니다.

반면,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 또한 큰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말 한 마디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관계회복을 위하여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요21:5)“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그러자, 베드로는 “없나이다.”

친구나, 부부가 서로 다툰 후 서먹서먹하게 됩니다. 이때에 딱히 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친구를 만나 “요즘 회사 괜찮나?”라고 물으며, “응 회사 잘 있어!”, 부부 같으면 “애들 학교 갔어요!” “학교 갔어!” 다툰 것과 아무 상관없는 말을 주고받으면 풀리게 됩니다.

주님도 베드로에게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자고 있을 때부터 알아봤다. 계집아이 앞에서도 나를 모른다고 했지?”,“지금 여기에 왜 왔어!” 이렇게 말하지 않고, “고기가 있느냐?”, “없나이다.” 동문서답 같이 보이는 대화를 통해서 관계를 회복하셨습니다.

베드로를 아프게 한 것도, 베드로가 회복된 것도 아주 작은 말 한 마디에서 비롯된 것처럼 대인 관계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 비뚤어질 수 있으며, 아주 사소한 것을 통해 회복 될 수 있습니다. 복잡하게 얽혀져 있는 것 같아 보이는 문제도 “밥 먹었어!” 말 한마디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1. 관계회복은 얼굴을 마주하는 데서 시작된다.

처음 베드로가 주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게 된 것은 주님의 얼굴을 피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눅22:54-55)“예수를 잡아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 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이 일이 있기 얼마 전(눅22:33)“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베드로는 주님과 거리를 유지하는데 실패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뒤에 멀찍이 따라간 것은 유리할 때 뒤따라갈 수도 있지만, 불리할 때 도망가겠다는 뜻입니다.

실제 불리해 보이자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 있는 곳까지 찾아가 식사자리까지 마련하였습니다. (요21:12-13)“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주님은 베드로가 시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식사 자리를 통해 대화도 나누고, 무엇보다 베드로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이 순간 베드로의 마음은 미안함과 고마움, 어색함과 불편함이 교차 되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시선과 얼굴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얼굴을 대면한 후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얼굴을 피합니까?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얼굴과 얼굴을 마주할 때 비로소 관계가 회복됩니다. 관계 회복에 식사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초대교회는 날마다 같이 하여 음식을 먹었습니다. 교회에서 식사 준비하는 것이 수고가 크지만, 그 수고만큼 가치가 있습니다. 부부, 가족, 친구, 이웃, 그리고 주님과 나 사이에 틈새가 생기지 않았는지 날마다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귀는 이런 틈새를 노립니다.

한두 번 관계가 무너진 것으로 포기해서 안 됩니다. 무너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관계회복은 말 한마디로 가능합니다. 관계회복은 얼굴을 마주할 때 가능합니다. 주님을 통해 베드로가 관계를 회복한 것처럼, 우리 또한 서로의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 있길 바랍니다. 식사 초대까지도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성도들이 주님으로 축원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