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9일 주일 설교 원고 : 예수님의 눈높이 교육

성경 : 마태복음 7 : 28 – 8 : 4

제목 : 예수님의 눈높이 교육                                             2015. 4.19

어떤 박물관의 수위는 박물관의 모든 진열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쪼그려 앉아서 살펴보는 관람객을 보고 궁금해 하였습니다. 궁금한 수위가 신사에게 “왜 앉아서 작품을 보십니까?” 물었더니, 신사는 “빙그레 웃으며 내일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대답만 하고 떠나갔습니

다.

다음날, 그 신사는 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을 인솔하여 박물관에 견학을 왔습니다. 오늘도 선생님은 어제와 같이 쪼그려 앉아서 아이들에게 진열품에 있는 작품에 대해 설명해 주는 것을 본 수위는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이 선생님이 바로 눈높이 교육으로 유명한 피바디 선생님입니다.

눈높이 교육으로 유명한 피바디 선생님의 눈높이 교육방법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수식어를 많이 사용하지 말고 짧은 문장을 사용하라. 둘째, 이해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단어들을 사용하지 말라. 셋째, 한꺼번에 많은 것을 가르치려고 하지 말라.

본문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6,7장의 산상보훈의 말씀을 하신 이후에 청중들의 반응을 마태가 기록한 것입니다. 청중들의 반응은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가르치셨기에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지?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당시 서기관들과 어떻게 다른지 함께 생각하며 “예수님의 눈높이 교육”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쉽고 재미있게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대체로 군중들이 많이 모였을 때, 오늘 본문의 앞부분, 산상보훈을 가르칠 때나, 마태복음 13장 비유로 교훈을 하실 때는 강론을 했습니다. 강론은 오늘의 설교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산상보훈의 강론은 마태복음 5장에서 7장, 오늘 본문 앞부분까지입니다. 예수님의 강론은 상당히 길었고, 내용도 다양하며,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청중들의 반응은 (8:1)“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오랜 시간 동안 말씀을 들으면 지루하여 도망가기 바빴을 것인데, 수많은 무리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어린 아이들로부터 어른까지, 배운 자나 무식한 자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당시 시대에 통용 되는 말로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마5:10)“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산상보훈의 말씀을 지금 한국에 있는 초 중,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쳤다면 어떻게 가르치셨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겠나 생각해 봅니다. “주님을 위해 왕따를 당하는 자가 복이 잇나니 천국이 저희에게 있을 것임이요.

또한 예수님은 재미있게 가르쳤습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은 언제나 근엄하시고 진지하시며 유머가 전혀 없는 분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 유머와 위트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실 때에 저들을 향해 (마23:24)“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도다” (마7:9-10)“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위트가 넘쳤습니다.

지금 사랑의교회 유아유년부는 15명 정도 됩니다. 제일 어린 막내가 “별”, “수지”인데, 제가 매월 마지막 주일에 한 번씩 이들 앞에서 설교를 합니다. 어렵겠습니까? 쉽겠습니까? 아이들이 제 설교를 잘 듣겠습니까? 아니면 한 눈 팔고 장난치겠습니까? 한 사람도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 말씀을 잘 듣습니다. 수아나 유나 까지도 잘 들으며, 개구쟁이 민호, 주안이는 아주 모범생입니다.

우리교회 주일학교 교사들이 교육을 잘 시킨 득분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어려운 이야기는 듣지 않거나 듣고 쉽게 잊어버리지만,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는 잘 듣고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쉬운 성경을 어떻게 하면 어렵고 고상하게 가르칠까?”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진리는 간단, 명료합니다.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너무나 명료하고 확실한 진리를 바르게 믿고 붙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대화와 질문을 통해 가르쳤습니다.

설교와 강론에는 질문이나 대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산상보훈이나, 스데반의 설교에도 질문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열두 제자와 같이 몇몇 사람들이 모였을 경우에는 가르칠 때 대화를 많이 하셨고, 한 두 사람이 있을 때는 대화와 토론을 통해 가르쳤습니다. (마16:13-14)“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15:34)“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경우에 질문을 합니다. 알기 위해서 하는 질문이 있고, 이미 알고 있으면서 상대방의 약점을 찾기 위해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많은 질문을 하였는데, 궁금해서 질문을 하였습니다. (요9:1)“주님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는 누구의 죄 때문에 소경으로 태어났습니까? 그 보모입니까? 아니면 그 자신입니까?

후자의 경우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이들은(막12:14)“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했을 때 주님은 오히려 반문을 하셨습니다.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예수님이 모르시기 때문에 물어보신 것이 아니라 질문을 통해 잘못을 깨우쳐 준 후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또한 대화를 통해 가르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니고데모가 “주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질문하자, 주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진지하게 대화를 통해서 니고데모에게 진리를 가르쳤습니다.

마태복음 19장 부자 청년과의 대화나, 요한복음 4장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도 긴 대화의 시간을 통하여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해답을 찾도록 하셨습니다. 이처럼 대화 형식은 많은 사람이 모였을 때가 아니라 주로 일대일의 가르침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교육에 질문과 대화가 아주 중요합니다. 한국과 유럽교육의 차이점은 질문입니다. 한국에서 질문을 많이 하는 학생은 공부를 못하는 학생으로 취급받으나, 유럽에서는 질문을 많이 하는 학생이 공부를 잘 하는 학생으로 평가받습니다. 유럽에 살다가 한국으로 이사 간 어떤 자녀가 수업 시간에 질문을 많이 하는 바람에 왕따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대체로 한국 부모는 아이들의 질문을 귀잖아 합니다. “아이가 엄마 이것 뭐야!” “꽃”, 아이가 또 질문을 합니다. “엄마 꽃 이름이 뭐야?” “몰라”, 아이가 세 번째 질문을 합니다. “엄마 저 꽃은 왜 노란 색깔이냐?”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만약 아이가 계속 질문을 한다면 어떤 말이 나오겠습니다. “입 닥쳐라!” 잘 모르면 “나중에 아빠한테 물어보자!”,“책을 찾아보자”말해야 합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질문과 대화 번거롭게 생각해서는 안 되며, 질문은 결코 나의 사생활을 간섭하는 것이나, 침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종종 질문하고 답해줘야 합니다. “금번 학기 시험을 어렵지 않았니?” “몰라요!” “요즘 여자 친구, 남자 친구와 잘 지내니?” “유치하게 그런 질문을 해요!” 라는 말을 듣는 다고해도 질문을 해야 합니다.

자녀들이 말은 투명스럽게 해도, 질문을 받고 나면 책임감을 더 느끼게 되며, 우리 부모가 관심을 가지고 있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잠 15:1)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가족과의 질문과 대화, 성도 간의 대화와 질문을 통해 신앙이 성숙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성숙한 대화와 질문을 잘 하는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비유와 실물교훈을 통해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비유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4복음에만 비유가 37개며, 마태복음에만 22개 비유가 나옵니다. 이것은 중복된 것을 포함한 것이며, 전체를 합하면 이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마13:34)“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주님은 많은 비유를 통해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역할을 하였으며, 예수님의 비유는 지혜롭고 유익하여 아무런 편견 없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비유”란 헬라어 “파라볼레(parabole, 영어, 패러블”란 말은 “나란히 놓는 것”을 뜻하는데, “한 물건을 더 잘 알도록 하기 위해 다른 것을 옆에 나란히 놓아 본다.”는 동사에서 온 말입니다.

마태복음 21장, 예수님은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저주하므로 곧 말라죽었습니다. 이것을 본 제자들이 “무화과나무가 왜 말라 죽었나이까?” 하자, 주님은 그 무화과나무가 누구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꾼들이 모여, 돈을 바꾸고, 제물들을 팔고 사는 것을 보시고, “너희가 강도의 굴혈을 만든다.”라고 하시면서 그들을 쫓아내었습니다. 성전을 청결하신 뒤 베다니에서 하루 밤을 쉬신 다시 예수님께서 아침에 예루살렘 성을 향해 오시다가 열매 없는 무화과를 보셨습니다.

무화과를 저주하신 것은 성전 청결 사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즉, 주님께서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이제부터 영원토록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는 이 말씀은 바로 예루살렘 성전과 성전 에서 일하는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열매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심판에 대한 비유이자, 실물교육입니다.

예수님이 교육방법 중 하나는 삶을 통한 교육입니다. 제자들이 누가 큰가! 서로 다투고 있을 때 예수님은 친히 그릇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요13:14)“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교훈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기도의 본을 보여 주시면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실제 용서해주면서 용서를 가르쳤습니다. 가르침이 힘이 없는 이유는 모범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녀교육의 어려움은 바로 본을 보이지 못한 데서 비롯됩니다.

주님은(마28:19-20)“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다른 사람을 제자로 삼고, 가르쳐야하는 교사입니다. 우리 또한 주님의 가르침을 잘 받을 뿐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잘 가르치는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